주간조선    2004.09.12 18:39

남가주대 노리스 종합암연구소 ‘한인 1.5세’유보라씨


미국에서 호평을 받는 암 연구지 ‘캔서 셀(Cancer Cell)’은 최근 8월호에 신개념 항암제 ‘제불래린(Zebularine)’을 비중있게 다뤘다. ‘제불래린’은 간편하게 입으로 투약하면서도 기존 항암제와 달리 위가 손상되지 않는 항암제. 현재 이 약을 임상실험 중인 LA 남가주대 노리스 종합암연구소(USC/Norris Comprehensive Cancer Center)는 지난 8월 23일 ‘신개념 항암제 제불래린의 암세포 표적’이란 연구결과를 발표해 의학계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이 새로운 항암제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과학도가 올해 나이 24살에 불과한 한인 1.5세 크리스틴 유(한국명 유보라)씨다. 현재 USC 생화학, 분자생물학 박사과정 3년차인 그녀는 미국 의학계가 주목하는 이 항암제의 상용화를 위해 연구실에서 실험용 쥐와 씨름하고 있다. 과학도로서의 자신의 미래 역시 이 항암제의 성패에 걸고 있는 셈이다.


지난 8월 31일 노리스 종합암연구소 7층에 자리잡고 있는 연구실에서 크리스틴 유 책임연구원과 지도교수 피터 존스 박사(Peter Jones, Ph.D)를 만났다. 존스 박사는 유전자 메틸화(DNA Methylation) 연구 분야에서 명성을 얻고 있는 세계적 학자. 크리스틴 유 연구원은 존스 교수 지도 아래 유전자 메틸화를 연구하는 팀에 속해 있었으나 지금은 혼자서 ‘제불래린 프로젝트’를 맡아 연구하고 있다.

유 연구원은 “신약 항암제 ‘제불래린’은 기존 항암제와는 달리 편리하게 경구 복용할 수 있을 뿐더러 치료 효과도 뛰어나 암 환자들에게 희망을 줄 것”이라며 “앞으로 4년 정도의 임상실험을 마치면 상용화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쥐 실험에서 암세포 68%까지 억제

‘제불래린’은 원래 미국암협회가 1980년대 다른 항암제와 함께 사용하기 위해 개발한 물질. 이후 학자들은 ‘제불래린’ 자체가 항암작용이 있다는 데 착안해 연구를 시작했다. 지난해부터 쥐를 실험 대상으로 삼아 연구에 가속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번 연구를 총괄하고 있는 피터 존스 박사는 “‘제불래린’을 투여한 쥐의 실험에서 암세포의 성장이 32%에서 68%까지 억제되는 효능이 나타났으며, 정상세포에 미치는 작용도 12%에서 21%로 나타나 기존 항암제에 비해 부작용도 크게 감소하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유 연구원은 “이 같은 ‘제불래린’ 성과에 대해 국립암연구소(NCI)에서 올해 안으로 임상실험을 실시하도록 권유하고 있다”면서 “이미 임상실험에 쓰일 약을 많이 제조해 놓은 상태”라고 말했다. 또 그녀는 “현재 임상실험에 자원할 환자를 모집하고 있다”면서 “이미 여러 대학이나 병원 등에서 준비단계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제불래린’의 가장 큰 특징은 주로 암세포를 죽이는 역할을 하는 기존 항암제와 달리 암세포나 암세포가 되기 직전 조직의 유전자를 원래 형태로 복구시키는 작용을 한다는 것. 즉 애초에 생성됐던 유전자의 기능을 되찾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제불래린’이 신개념 항암제라는 점에 대해 유 연구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항암제는 주사를 통해 투여하고 ‘키모 테라피(화학요법)’ 치료를 받을 때도 링거 주사를 장시간 맞는다. 그러나 ‘제불래린’은 하루에 두세 번씩 경구약으로 복용할 수 있다. 이 약은 위에 들어가도 소화가 잘 된다. 기존의 항암제들은 위에서 소화가 잘 되지 않기 때문에 위가 손상 당하는 부작용이 많이 발생하는 편이다.” 그녀는 실험용 쥐에 ‘제불래린’을 주사로 투여해 보기도 하고, 입 속으로 먹여도 보았는데 3주 정도 후에 암 조직세포가 현저히 줄어드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특별한 부작용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번의 ‘제불래린’ 개발은 유전자 조절에서의 메틸화 연구에 기초를 두고 있다. 유전자 메틸화 연구란 최근 미국에서 활발히 이뤄지는 유전자의 발현이나 발현 시기를 조절하는 비유전적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와 관련 있는 분야. 눈 색깔이나 피부색 등 인체의 구조나 특성이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유전자 형태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며, 그러한 특성을 가진 유전자가 발현된 결과이다. 반대로 그러한 특성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유전자가 발현되지 않는 결과인데, 발현되지 않은 유전자를 조절하는 것이 바로 메틸화이다.

새로운 항암제 연구를 떠맡은 유 연구원으로서는 유전자 메틸화 연구의 대가인 피터 존스 박사를 지도교수로 만난 것이 대단한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많은 과학자들이 암 발생의 원인을 유전자 돌연변이로 생각해왔다. 이에 대해 크리스틴 유 연구원은 “우리 연구팀은 메틸화가 진행되는 유전자의 구조가 균형이 잡히지 않아 암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며 “한마디로 필요한 유전자는 닫혀있고 암세포 분열을 증식시키는 유전자는 열려 있어 암조직이 계속 증가한다고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이 약을 투여하면 어느 세포에 들어가든지 메틸화되었던 유전자들을 원상태로 되돌려 유전자 특성을 잘 나타낼 수 있게 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제불래린’은 특정한 암을 치료한다기보다는 악성암이 되기 전의 암세포를 다시 정상세포로 복구시키는 역할을 한다. 물론 심하게 돌연변이 된 유전자를 삭제하는 역할도 한다. ‘제불래린’의 상용화와 관련, 그녀는 “이미 암에 걸려있는 환자들에게도 유용하지만 암 조기예방제로 개발하기 위해 연구 중”이라고 덧붙였다.

“암은 생활습관에서 오는 병”

‘제불래린’을 연구하는 사람은 현재 유 책임연구원 혼자이지만 이와 관련된 데이터 수집을 위해 여러 기관에 있는 연구원들과의 공동협력 작업도 하고 있다. 노리스 종합암연구소에서 당초 ‘제불래린’의 연구는 조너선 챙 박사가 시작했다가 존스 지도교수에 의해 유 연구원에게 인계됐다. 이번 연구는 국립암연구소의 지원으로 미국의 마이애미 의대와 덴마크의 아르허스 의대병원 등이 공동으로 실시하고 있기도 하다.

크리스틴 유 연구원의 실적에 대해 현재 국립암연구소의 실험실장을 맡고 있는 빅터 마르케스 박사는 “앞으로 1년 정도 후에는 보다 확실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면서 “현재까지는 초기 개발단계이기에 과학적인 연구가 계속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르케스 박사는 항암 연구 논문만도 250편이나 되며 특허보유도 21건이나 지니고 있다.

연구실에서 인터뷰를 마친 크리스틴 유 연구원은 필자를 자신의 실험실로 안내했다. 특수마스크와 세균 전염 차단을 위한 복장으로 갈아 입은 다음 실험실로 들어섰다. 그녀는 현재 쥐를 상대로 매일 ‘제불래린’ 투약실험을 하고 있다며 근접촬영은 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아침에 연구실에 나오면 실험에 사용할 쥐들을 관리하기에 바쁘다. 요즘은 쥐들이 새끼를 치고 있어 매일 확인을 해야 한다. 과거에는 제한된 함량만 쥐에게 투약했으나 최근에는 쥐들이 스스로 먹도록 시약을 물에 타주고 있다. 지난 2개월 동안 그녀가 실험한 쥐만도 250여마리. 쥐 실험 이외에 그녀가 분양하고 있는 세포를 관리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오후 시간에는 다른 실험을 하거나 지도교수와 연구과제에 대한 토의를 한다. 그녀는 “연구를 하다보면 식사도 제대로 못할 때가 많다”며 “지난해 크리스마스 시즌도 연구실에서 보낼 정도로 바쁘게 지냈다”고 말했다. 유 연구원은 ‘존경하는 과학자가 있느냐’는 물음에 바로 “피터 존스 박사”라고 지도교수를 꼽았다.

암에 대해 일반인들에게 조언을 부탁하자 그녀는 “암은 생활습관에서 오기 때문에 식이요법을 잘 하면 예방할 수 있다”면서 ”부모로부터 암 인자를 유전 받았더라도 생활습관으로 고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유 연구원은 12세 때 부모를 따라 미국에 이민와 LA 근교 세리토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비머드 칼리지에서 화학을 전공, 부전공으로는 피아노를 했다. 현재 계획은 USC의 포스트 닥터 코스에서 DNA 메틸화 연구를 계속할 예정. 바쁜 연구생활 중에도 음악을 계속하고 여행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음식 만들기를 좋아한 유 연구원은 화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도 “음식조리 하는 것이 화학실험 하는 것과 비슷해서”라고 했다. 한국에서 약사였던 어머니가 “약은 나쁘니까 많이 먹지 말라”는 말을 자주해 “아픈 사람들은 약을 먹으면 낫는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데 ‘왜 약이 나쁜가’를 자꾸 질문하다가 화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떠나는 필자에게 그녀가 남긴 말은 “약 많이 먹지 마세요. 간 나빠져요”였다.

LA = 김지현 자유기고가(lia21c@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