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5.4 (수) 17:14  

이건희 삼성 회장이 고려대학교에서 대학생들의 기습시위로 곤욕을 치른 것과는 대조적인 사건이 두 달 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있었다.

지난 3월 2일 체감온도 영하 20도를 기록하는 혹한의 날씨에 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사장은 '미래 IT시대 반도체의 역할'을 주제로 하버드대 강연이 예정돼 있었다.

삼성 관계자들은 초조해 했다. 수업시간과 겹치는 데다 날씨마저 추워 강의실이 썰렁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우였다. 강의시간 30분 전부터 몰려들기 시작한 학생들로 강의실은 초만원이 됐다.

학교 관계자들은 부랴부랴 간이 칸막이로 된 벽을 헐어 좌석을 넓혀야 했다. 하버드대 학생들은 물론 인근 MIT에서 대거 학생들이 몰려왔다.

1시간 남짓 진행된 황 사장의 강연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학생들의 반응도 좋았다. 강의를 마칠 때까지 자리를 뜨는 학생들이 거의 없었다. 한 학생은 "삼성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며 "기회가 온다면 삼성에서 일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이건희 회장을 맞은 고려대와는 천양지차였다.

미국 대학생들이 세계적인 기업의 일원이 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는 반면 한국의 대학생들은 물론 일부이긴 하지만 여전히 기업을 적대시하고 있는것이다.

미국에서 기업과 대학은 '자본주의'를 이끌어가는 양대 축이다.

기업들의 천문학적인 기부를 통해 대학이 발전하고 또 대학은 기업을 위한 인재를 배출하는 시스템이다.

이 같은 문화는 이미 100년 넘게 미국 사회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물론 초창기 미국 대기업들이 독점이윤을 통해 성장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일부에서는 '추악한 돈'이라는 비난도 있었다. 하지만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는 말이 있듯이 이들 기업은 너나없이 대학에 투자해 오늘날의 미국을 일궜다.

철강왕 엔드류 카네기.

그는 제철사업에서 번 돈으로 1900년 피츠버그에 카네기 공과대학을 설립했다.

20세기 초부터 국제적인 연구기관으로 명성을 날릴 수 있도록 재정적인 지원을아끼지 않았다. 67년 인근의 멜론대학과 통합해 카네기멜론으로 개명했고 카네기의 유산 6000만달러를 기반으로 공학분야에서 세계적인 대학으로 성장했다.

남부 명문 밴더빌트대학의 설립과정은 당시 사회적 갈등을 보여준다. 철도왕 밴더빌트는 상당액을 하버드대학에 기부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했다.

하지만 하버드가 이를 거부했다. 독점을 통해 번 돈을 깨끗한 학문의 전당이 받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화가 난 밴더빌트는 하버드가 보기 싫다며 멀리 남부 테네시주 내슈빌에 단독 대학을 설립했고 이것이 오늘날의 밴더빌트대학이다.

석유왕 록펠러가 미국의 문화와 학문에 끼친 공헌은 지대하다. 그는 록펠러재단을 통해 수많은 문화사업을 벌였고 또 록펠러대학이라는 출중한 대학을 설립했다.

1901년 록펠러 의학연구소로 출범한 이 대학은 당시로서는 세계 최초로 병의 근원을 조사하는 바이오메디컬 연구를 전담하는 기관이었다.

지금까지 노벨상 수상자 23명을 배출한 것이 말해주듯 의학연구의 대명사로 간주되고 있다.

◇ 단과대학 명칭은 기부자 이름이 대부분＝미국 내 대학 건물명칭이 사람 이름으로 시작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거액 기부자,미국을 빛낸 인물 등의 이름이 건물 앞에 붙는다. 미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인 와튼스쿨은 매년 랭킹 3위 안에 드는 명문이다. 와튼이라는 명칭도 1880년대 경영대학원 설립에 결정적 도움을 준 기업인의 이름이다.

와튼스쿨이 사용하는 건물 명칭은 '헌츠만 홀(The Huntsman Hall)'이다. 헌츠만은 졸업생도 아니다. 남캘리포니아대(USC)의 야간 MBA 과정을 마쳤다. 고무 포장용기 등을 생산하는 '헌츠만주식회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화학업계의 대표적인 기업인이다.

그는 최근 학생 1600여 명이 사용하는 8층짜리 전용건물을 선뜻 기부했다. 뿐만 아니다. 이 건물 각층에 마련된 스터디룸에는 각 룸마다 건물 공사비를 제공한 기부자들의 명단이 빼곡히 적혀 있다. 도서관 '리핀코드 라이브러리(The Lippincott Libarary)', 학생회관격인 '쿠 플라자(The Koo Plaza)' 등도 업적과 학교 기여도를 감안해 사람 이름을 학교 건물로 사용한 사례다.

뉴욕에 소재한 컬럼비아대학도 마찬가지다. 이 학교 경영대학원 건물은 기업가이름을 딴 '유리스 홀(The Uris Hall)'이다. 최근 건립한 제2 경영대학원 건물인 '워렌 홀(The Warren Hall)' 역시 학교 발전에 기여한 기업가 이름을 따 건물에 이름을 붙인 사례다. 건축대학 건물인 '에이버리 홀(The Avery Hall)' 역시 유명한 건축가 에이버리의 이름을 따라 명명됐다.

◇ CEO 대학순례는 자랑스런 전통＝이러한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기업가를 인정하고 우대하는 풍토를 만들었고 대학들은 일상 수업에 기업 최고경영자(CEO)를적극 초청해 학생들과의 대화채널을 열어주고 있다.

와튼은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리더십 강의를 열고 있다. 물론 강사는 기업CEO나 최고재무책임자(CFO)들이다. 올 1월에는 세계 최고 스포츠업체인 나이키의 CFO 도널드 블레어가 학생들과 대화를 나눴다.

또 3월에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최고경영자인 켄 체널트가 학교를 방문했다. 4월에는 휴렛패커드의 전 회장 류 플렛이 리더십 강의를 했다. 젯 블루의 데이비드 바저 사장도 올해 학교를 방문할 계획이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며 하버드를 중퇴했던 빌 게이츠 MS 회장도 연초 하버드를 방문해 학생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게이츠 회장은 모교인 하버드에 컴퓨터공학 연구시설을 지원하기도 했다.

블룸버그 뉴욕시장은 모교인 존스홉킨스대학의 열렬한 팬이다. 현재도 이사회 멤버인 그는 자서전에서 "은퇴 후의 나의 생활을 예측한다면 아마 존스홉킨스를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모습일 것"이라고 각별한 애정을 표시한 바 있다. 그 역시 시장으로 재임하면서 주요 정책결정을 대학에서의 강연을 통해 자주발표하고 있다.

◇ 산학협동으로 '천재급 인력'배출해야＝물론 이번 고려대 사건을 두고 한국 대학사회의 '반기업 정서'를 침소봉대할 필요는 없다. 이미 압도적인 재학생들이 총학생회의 이번 행태를 "말도 안되는 작태"라고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최근 들어 대학과 기업의 자연스런 교류는 매우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이미 적지않은 전직 CEO들이 대학 강단에 섰고 현직 CEO들의 대학생을 상대로 한 특강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또 기업이나 기업인의 이름을 딴 대학건물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오히려 문제는 대학이 초일류기업이 원하는 '천재급 인력'을 배출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이미 삼성은 주요 CEO들이 외국출장중에는 반드시 외국의 최고급 인력을 스카우트하기 위한 인터뷰를 정례화하고 있다. "천재 한 명이 만 명을 먹여 살려야한다"는 이건희 회장의 평소 지론이 반영된 결과다.

이미 한국 대학에서 그런 인력을 구하기는 힘들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평가다.

결국 기업의 대학에 대한 투자와 그 재원을 바탕으로 한 대학의 노력은 '국제경쟁력을 갖춘 인력 양성'에 맞춰져야 할 것이다.

[뉴욕 = 전병준 특파원]